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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品

[161] 현암 최정간崔楨幹, 井戸茶碗 (2010.6.7, 0004800)


<참고자료>

새미골 요를 가다

진교 백련리 새미골 가마에 가다

편집위원 권종대, kcdkcd

등록일: 2009-05-13 오후 7:11:01

 
▲ 취화선 영화촬영지 안내판 
진교 새미골 요를 가다
예고 없이 도착하니 장금정 선생님은 계시지 않고 하동 차문화축제에 가셨다고 하였다.
전화를 드렸더니 기꺼이 달려와 늦은 시간까지 백련리 도공에 얽힌 사연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함께 하였다.
백련(白蓮)리 새미골 도요지는 16.17세기 조선 자기의 본류인 분청, 상감, 철화백자를 굽던 곳으로 전통 막사발의 본고장이자 일본 국보 찻잔인 이도다완(井戶茶碗) 생산지로서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하얀 연꽃이 어우러진 이곳 백련리 도요지에서 투박하면서도 새의 붉은 혓바닥과 이슬을 머금은 듯한 독특한 문양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눈 박이 사발과 도공을 강탈해 가 자기네 국보로 둔갑시켜 숭상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1974년 경상남도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옛도공의 후손들이 조선 막사발의 명성을 재현하고 있으며 2002년 국내영화사상 최초로 칸느 영화제 본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영화 취화선의 촬영장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하동군은 매년 5월 25일 차의 날을 전후해 이곳 백련리 도요지에서 도예(淘藝)와 백련지(白蓮池)를 주제로 찻 사발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도예 체험과 연지 산책등 농촌 테마형 문화체험이 가능 하도록 각종 편의시설과 테마시설을 지속 확충 중에 있었다.
처음 보는 이는 시 공간의 과거로 회기 하는 느낌의 분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 취화선 그림방 
옛 도공의 혼 숨 쉬는 새미골
하동은 차의 고장이다. 쌍계사 지나 칠불암에 이르는 화개골은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이자 국내 야생차 생산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명실상부한 차의 본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개골에서 차향을 맡고 차를 마시며 심신의 피로를 달랜 후 돌아간다.
하지만 차와 불가분의 관계인 곳이 있다. 바로 진교면 백련리의 도요지터다. 차와 다기는 바늘과 실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샘문골’이라는 옛 지명을 따 ‘새미골’로 불리는 마을에는 16~17세기 초반에 걸쳐 사용되던 조선시대 가마터 3개가 있다. 사발, 잔, 접시, 병, 항아리 등 생활자기를 주로 이곳에서 구워냈다. 가마들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파괴됐다. 이 때 이곳에서 일하던 400여명의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단다.
백련리 도요지가 주목받는 이유는 일본의 ‘국보급’ 자기로 인정받는 ‘이도다완’의 탄생지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즉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막사발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이도다완의 시초라는 주장이다. 가마터 주변에서 발견된 이도다완과 흡사한 자기 파편들이 이러한 논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 뒤뜰의 옹달샘 
도예가 장금정 선생 백련 심으며 가꿔 마을은 지난하고 고달픈 전쟁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어서인지 유독 평화롭다. 굽잇길을 따라 들머리에 접어들면 연꽃 밭이다. 하얀 연꽃이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월이 되면 백련이 만개한단다. 백련리란 지명도 이 연지에서 유래된 것이다. 연지 주변으로 위치한 민가의 풍경도 정겨웠다.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연지는 버려진 땅이었다. 도예가 장금정 선생의 노력 덕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막사발에는 조선백성의 혼이 담겨있다. 과식이 없이 아름다우며 소박하면서도 안으로 성숙하다.” 조선 자기에 대한 이러한 애정은 그녀를 30년 전 이곳에 정착하게 만들었다. 마을 일대의 땅을 모두 구입한 그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던 옛 가마터를 보호하기 위해 ‘새미골 가마터’란 문패를 건 가람을 짓고, 쓰레기장 같던 연못에 백련을 심었다. 이 와중에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5년여 동안 ‘이도다완’의 생성과정과 현장을 돌아보며 공부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히는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취화선>의 마지막 촬영을 이곳에서 진행하고 인기 TV 드라마 ‘대장금’에 등장하는 자기들을 전부 협찬하는 등 지금도 그녀는 조선 사발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 영화 취화선 촬영지 가마터 
진교 새미골 요의 유래를 보면
하동 진교의 사기촌 새미골(井戶鄕) 요의 주인인 도예가 최정간씨가 이도(井戶)의 고향을 새미골로 밝혀내고 확정짓기까지 4백년이란 긴 세월동안 진교는 도자기와 차를 잃어버린 남해안 바닷가 한적한 갯마을이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역사의 장에서 밀려난 진교, 진교는 사실상 임진왜란이 있기 전까지는 기후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봐 우리나라 다도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진교를 중심으로 그 서북쪽은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심게 했다는 차밭이 있는 지리산, 지리산 준령이 남으로 뻗어내려 낙남정맥의 시원지에 진교는 자리하고 있다. 2억 5천만년이나 나이를 먹어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차완의 태토로는 제일로 치는 철분이 듬뿍 섞인 백토를 무진장 만들어 놓은 곳이다.
차나무가 자라기에 안성맞춤인 기후와 토질에서 다기를 굽는데 둘도 없는 흙이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곳이다. 동쪽 8킬로 떨어진 곳에는 차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천의 다솔사가 있고 서쪽 또한 차의 고장이자 차사로 많은 차승을 배출한 순천의 송광사가 있는 땅이다.
남쪽 또한 코앞에 있는 노량해협을 건너면 지금도 다정리 다천 등 차의 옛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는 남해군이 앞을 막고 있다.
현재 진교면 버스정류장이 있는 시장은 일제시대 간척사업으로 매립되기 전에는 진제포라는 도자기 무역항이었다. 진교에서 나오는 도자기가 진제포 선창에서 배에 실려 대마도로 또는 구주 등 일본 각지로 떠났고 임진란이 끝나 왜군이 철수할 때 안(安), 정(鄭), 이(李), 하(河)씨 등 22개의 성시를 가진 80여 도공이 진제포를 통해 강제로 끌려갔다. 한치의 틈도 없이 주위를 빙둘러 싸고 있는 차의 고장이 이곳이다.
일본 교도 대덕사에 보존되어 있는 이도차완을 두고 오래전부터 日人들은 그 발생지를 "경남 김해 진주일 것이다."란 추정을 해왔다.
일본에 현존하는 고라이차완의 명칭이 대부분 생산지나 수출항의 지명이 붙어있다. 때문에 이도는 정(井)자나 호(戶)자만 붙어있는 지명이면 모두가 한번씩 이곳이 고향이라고들 해왔다.
새미골이 있는 자리는 이곳의 토박이 이성규씨가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집 뒤쪽 감나무 밭과 산언덕 주위인데 이곳에는 잡초와 더불어 온 비탈에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 장금정 전시실 
72년에 이곳을 답사한 야시모도씨가 쓴 조선의 도자와 古도요지 답사기란 책에는 "이곳 진교 도요지는 4세기~ 6세기~ 16세기로 추정된다. 파편조각의 특징은 도자기 마디가 높고 외부와 내부 허리부분은 매화열매 껍질 색깔로 퍽 아름다웠으며 형태는 꼭 이도차완을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이곳을 찾는 일인들이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이 파편을 가마니나 배낭에 넣어 마구 가져갔다. 처음에는 예사로 취급했으나 계속 가마니로 반출되자 마을 주민들의 신고로 출입을 제한했다. 급기야는 경상남도 기념물 24호로 지정 보호하게 됐다.
이도(井戶)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학자들간의 주장이 서로 엇갈렸다.
*당시 조선과 무역을 통해 가져간 정호삼랑(井戶三郞)의 성을 따 붙였다는 설.
*당시 일본서 열린 차회의 명칭이 이도차회였다는 설.
*전북 정읍지방에 있는 요(窯)에서 나왔다는 설.
*흙으로 만든 그릇에 유액을 바르니 흙에 옷을 입힌다하여 옷의(衣)자와 흙토(土)를 합하면
의토 지나 세월이 흐르며 본음이 변하여 이도로 됐다는 설.
*그릇 표면벽의 짝짝 갈라진 균열의 모양이 꼭 새미정(우물정.井)자 형을 닮았다는 설.
*조선 무역항구에 샘이 있어 이 샘의 이름을 따 이도라는 등 이도차완은 4백여 년 신비의 베일에
져 있었다.
이 베일을 최정간씨는 시원하게 풀어버렸다.
결론부터 먼저 얘기하면 진교는 가락(駕洛)시대부터 각종 토기를 구워온 도자기의 고향이었다. 현재 일본에서 국보로 대접받고 있는 이도 차완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이곳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자 조선 도자기에 욕심난 일본은 소위<차완전쟁>이라는 임진 왜란을 일으켰다.
진교 새미골의 도자기는 물론 도공까지 수난을 당하며 진교의 도자기는 임진왜란과 함께 종말을 맞고 만다. 최씨는 우선 지명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고서를 통해 고증을 해냈다. 진교의 도자기와 무역을 한 일본 오사까 사까이 항을 비롯 도쿄 구주 등옛 무역항을 찾아 도자기 파편을 수집했다. 국내 또한 경남북 전남북 등 옛 도요지를 전부 답사, 파편을 모아 흙의 성분을 분석 비교한 끝에 확실한 결론을 얻었다.
일본인 학자들 또한 *틀림없는 이도차완의 도요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 장금정 정호다완 
지난 86년 1월과 2월호 일본의 도예전문잡지는 이도차완에 관한 한 한국인의 글을 한번도 싣지 않다가 "이도차완 생산지에 관한 신연구"라는 제목의 최씨의 글을 소상하게 게재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주목조에는 "새미골에 조선시대 초인 14세기 말에서 16세기까지 진주목 관하에 도기소를 두었다. 새미골은 진주 목 곤양군에 속한다."고 쓰여 있다.
곤양군에 속해있던 새미골은 1914년 한일합방 때 곤양군이 폐군되고 하동군에 소속되어 버렸다. 세종실록 지리지 진주목조에는 "주(州) 남쪽 반룡진에 도기소가 있는데 오로지 누런 용기만 만드는데 하품(下品)이다." 라고 쓰여있다.
여기의 반룡진이란 진교의 옛 지명이다. 진(辰)은 미리진자로 용이란 뜻이다.
1900년까지 사기촌에는 진제포란 포구가 있었고 한일합방 후 일인이 이 일대를 매립하여 간척지로 만드는 바람에 지금은 시장터가 되어 버렸다.
이 진제포 또한 가락국기條에 "대마도에서 구주, 평호, 대판까지 연결되는 항로"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에도 사기촌의 새미골요가 일본의 주문을 받고 그릇을 만들어 사(私)무역이 성행된 곳이었다.
이같은 증거는 또 사기촌에서 8km 떨어진 다솔사의 다솔사기에도 근거를 두고있다.
이렇게 해서 진교에 자기요가 있었다는 역사적 뒷받침은 됐고 여기다 진교면 사기촌의 속명이 새미골로 밝혀졌다. 새미골의 샘은 한문으로 泉이고 샘을 일어로 이도(井戶)라고 표기한다. 골이란 골짜기 마을이니 곧 향(鄕)이라 새미골은 곧 이도향(井戶鄕)으로 밝혀낸 것이다.
이도차완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본은 진제포를 통해 새미골 그릇을 많이 수입해 갔다.
현재 일본에 있는 차완의 명칭이 대부분 수출항 지명인 김해 웅천(진해) 보성 고창 무안 계룡산 등으로 되어 있다.
신비에 쌓인 이도차완의 베일을 벗겨낸 지금 진교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차유적지로 부상하고 있다. 15세기 다도문화의 극치를 이루었던 진교 사기촌 새미골은 21세기 다도문화의 구심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 백련지에 있는 물레 방아 
이곳은 또한 취화선 영화 촬영의 마지막 장소로도 유명하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의 위기가 연출의 효과를 만족케 하였다고 본다
1850년대, 청계천 거지소굴 근처에서 거지패들에게 죽도록 맞고 있던 어린 승업을 김병문을 이해주고 승업은 맞은 내력을 설명하며 김선비에게 그림을 그려 보인다.
세도정치에 편승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김선비. 거칠지만 비범한 승업의 실력을 눈여겨보고... 5년 만에 재회한 승업을 엘리트이자 역관 이응헌에게 소개하는데...
승업에게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를 추구할 것을 독려하고 선대의 명화가들 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라는 뜻에서 오원이라는 호를 지어준 김선비는 승업의 피드백 역할을 해주는 평생의 조언자였고 그런 승업은 행운아였다...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림의 안목을 키워가는 중 이응헌의 여동생 소운에게 한눈에 반해버리지만 가슴 설레는 첫사랑은 소운의 결혼으로 끝나고...
화가로 자리잡기 시작할 무렵 병을 앓던 소운이 죽어가며 자신의 그림을 청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가는데. 화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몰락한 양반 집안의 딸인 기생 매향의 생황연주에 매료된 승업. 매향은 승업이 그려준 그림에 제발을 써넣으며 아스라한 인연을 맺어나간다. 계속되는 천주교 박해로 두 번의 이별과 재회를 하고... 켜켜히 쌓인 정과 연민, 승업의 세계를 공감하고 유일한 여인이자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고매한 사랑... 아무도 그를 곁에 붙잡아둘 수 없었다. 임금의 어명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오로지 술에 취해야 흥이 나고 그 흥에 취해서야 신명나게 붓을 놀리는 신기. 술병을 들고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표정의 원숭이를 그리고 자신의 필력을 확인하지만...
화명이 높아갈수록 변환 점을 찾아야한다는 강박관념에 괴로워하고 한계를 넘으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날, 온몸의 기가 붓을 타고 흐르는 경험을 한다. 외부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자신의 붓소리를 듣게 되고...
매향과의 마지막 재회, 세상과의 마지막 재회. 매향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찌그덩한 그릇을 보고 승업은 그 안에서 자신이 그토록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를 보게 되고 조선의 운명인 듯, 또한 스러져가는 자신의 운명인 듯 그는 홀연히 세상을 등지고 사라져간다...

백연지, 도요지, 영화 촬영지, 함께하는 새미골의 아쉬움을 뒤로 두고 늦은 시간까지 안내를 한 장금정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자리를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