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http://blog.naver.com/jeminiii/120029112200
http://cafe.naver.com/redorblue/63
李快大의 눈물겨운 포로수용소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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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쾌대, <사과 따는 처녀>, 1963년작. 본갤러리 소장. |
1940년대 인물화로 가장 주목받았던 사람은 단연 리쾌대였다. 이중섭과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박수근(朴壽根)보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던 리쾌대. 가난한 시대 이중섭이 세간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행려병자로 불행한 삶을 마감할 무렵, 북행(北行)을 감행했던 리쾌대는 어떠했던가?
경북 칠곡 태생인 그는 광복 직후부터 조규봉(曺圭奉, 조각가), 리석호 등과 좌익 활동을 해왔다. 리쾌대가 의용군에 입대하고 국군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에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는 오늘까지도 읽는 이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수용소에 있습니다. 신병을 앓는 당신은 몇 배나 여위지 않았소? 안타깝기 한량없소이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내 맘은 지금 우리 집 식구들과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현란한 채색화가의 꿈같은 열망도 굶주린 가족의 신음 앞에는 무력했던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제도에서 북행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더 강했던 것일까?
리쾌대는 자강도 지방에서 현역 미술가로 활동하던 1957년, 서울에서 가르쳤던 제자 이병효의 중매로 재혼했다. 리쾌대는 철직(유배)을 당해 지방에 머무를 때 영화 촬영을 위해 자강도 지역을 방문한 여배우를 모델로 <사과 따는 처녀>를 그렸다.
1963년 작품이니 그가 죽기 2년 전이다. 화구(畵具)나 채색이 변변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1961년에 남겼던 작품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이후에 남긴 리쾌대의 또 다른 흔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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