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美術品

[129] 麗器陶窯 峯岩 尹柄欒, 青磁雲鶴文花瓶 (2010.1.23, 0062)


여기도요 봉암 윤병란作

1990년 5월.
내노라는 도예가들도 재현시키기가 어렵다는 고려청기와 재현에 성공한
여기도요(麗器陶窯) 봉암 윤병란(峯岩 尹炳란) 선생을 만났다.
 
당시 독립기념관과 같은 민족의 얼이 흐르는 건축물에
청기와 시공을 하였으면하는 바램으로 서슴없이 윤선생의 작업실과
재현된 청기와를 확인하고자 방문했다.
 
청기와의 시공은 선조의 얼을 함께 담는 문화재적 가치는 물론,
벼락 재앙 등을 피해가고 가히 전설적인 지붕재로서 그 곱푸른 색갈과
견고함은 반 영구적이라느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당시 전 재산을 청기와 제작에 바쳤다는 윤선생은
정말 멋진 공예가고 또한 장인의 풍이 온 몸에 베여 있었다.
 
그런데 한나절을  윤선생과 이곳 저곳을 둘러 본 뒤 대청 마루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부터 사단이 일어났다.
풍성한 식단에 곁 들은 반주가 지금 기억으로는 근 5시간 정도
얘기를 하면서 대작을 한 것으로 기억이 된다.
한 순배 돌리고 나면 또 다른 술을 가저 나와 이 술은 귀한 손님에게만 드릴려고
담근 술이라며 새롭게 술판을 벌린 샘이다.
 
간신히 작별인사를  하고
이 집을 빨리 벗어 나는 것이
더이상 결례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차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땅이 하늘과 맞 붙었다고 느낄 만큼 술에 취해 있었다.
 
조금만 벗어나면 여관이이나 쉴 곳이 있겠지 하면서도 차를 계속 서울로 몰고 있었다.
그곳에서 집에까지 4시간이나 걸려 도착하니 벌써 자정이 다 되었고,
온 집안식구들은 나의 무사 귀가에 반기면서도 원망이 앞선 것 같았다.
 
나를 보내 놓고 불안했던 윤선샌님이 회사에 전화를 걸어 집의 전화를 알았고
서울로 돌아간 나의 상태를 가족들에게 알린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남는 것은 이대로 잘 못 하다가는 죽는다는 생각과
대형 버스 뒤에 붙어서 가는 것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스 뒤에 졸졸 붙어서 운전해 온 것 같다.
그때 방문 기념으로 주신 도다기 몇 점은 회사 회장님실에,
그리고 우리 집에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다.
 
벌써 1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감히 안부 여쭙기가 겁이나고 민망합니다.
 
이제까지 그때 처럼 술을 많이 먹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하고,
그와중에 운전을 한 것은
생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기에 오늘 후기로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