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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品

[133] 趙誠主 作, 粉引徳利 (2010.2.1, 0041)



일본 작가 다고 기치로와 한국 도예가 조성주의 20년 우정

NHK PD 출신으로 영국에서 집필 활동 중인 작가 다고 기치로. 그가 쓴 책이 화제다. 한일 동시 출판된 「또 하나의 가족」은 한국인 도예가 조성주 그리고 그의 가족과의 20년간 추억이 아스라이 담겨 있다. 국적과 나이를 초월한 두 사람이 사람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고 기치로가 말하는 조성주 도자기에 일생을 바치는 그의 순수에 감동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다고 기치로(52)라는 일본 사람입니다. 제가 조성주 선생님을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입니다. NHK에 입사해 신입 PD로 활동하던 시절이었어요. 남쪽 규슈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83년 규슈 쪽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시모노세키에서 한일 도예가의 교류를 그린 다큐멘터리를 찍게 됐습니다. 아시다시피 시모노세키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예가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한국인 도예가 조성주씨를 알게 됐습니다. 조 선생님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알려진 도예가입니다. 이도다완(井戶茶碗)을 만들고 매년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며 호평을 받고 계시지요.

저는 직업상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니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일이 끝나면 사적으로 연락하는 기회는 별로 없지요. 그러나 조 선생님은 달랐습니다. 연세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시대의 단절된 전통을 회복시키는 외길을 걷고 계시죠. 그 순수한 열정에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실제 차완을 만드시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와 이론적으로도 연구하고 노력하십니다. 지금도 이도다완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기록과 상식을 바로잡는 책을 집필 중이시지요. 저는 외국인이지만 선생님께서 차완과 씨름하시는 모습을 보고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 조 선생님과 국적에 관계없이 오랜 친구가 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1984년 저는 회사에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조 선생님이 계시는 한국행 배를 탔습니다. 그는 도자기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이천에서 부인,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사심 없이 저를 반겨주는 그의 가족에게 또 한 번 감동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몰랐기 때문에 한자와 영어 단어를 써가며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그래도 날이 새는 줄 모르고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이후 저는 직장에서 휴가만 받으면 한국으로 내달렸습니다. ‘또 하나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죠. 그들은 언제나 나를 동생처럼, 삼촌처럼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친척이나 친구 모임에도 저를 데리고 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를 했습니다. 여름휴가는 늘 조 선생님의 가족과 함께 한국의 산과 계곡에서 보냈지요.

저는 한국인의 따뜻한 정에 점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일본에 돌아가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지금처럼 한국어 강좌나 교재가 많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NHK에서 방영되던 한국어 강좌를 테이프에 녹음하고 출퇴근 시간마다 들으며 한국어를 익혔습니다. 저는 점점 한국과, 조성주 선생님의 가족과 가까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르며 우리는 진정 가족이 됐습니다.

조성주가 말하는 다고 기치로 보면 볼수록 진솔함이 묻어나는 친구

말이 통하지 않던 시절에도 필담을 하며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는 조성주(왼쪽)와 다고 기치로.
나는 사회적 평판이나 지위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 그저 도공이올시다. 도예가도 아니고 그저 도자기를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되지요(웃음). 다고가 이야기했다시피 우리는 그렇게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으로 인사를 왔더라구요. 그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 격차가 심했던 때거든요. 그래서 잘사는 선진국에서 왔다고 목에 힘이나 주고 할 줄 알았지요. 게다가 도쿄대 출신에다가 방송국 PD니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면 볼수록 선입견과 달리 아주 진솔한 사람이더라는 겁니다. 또 기특한 것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우리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자꾸 질문하는 그에게 이것저것 대답해주다 보니 어느새 친밀감이 생기더군요. 한국어 실력이 이만큼 되는 것만 봐도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지요. 이제는 자연스럽게 누구와도 한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습니까.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와 만났던 당시 1980년대 일본은 한창 버블 경제였다고 합니다. 사회 분위기가 흥청망청했던 모양입니다. 진실은 없는 겉만 화려한 허상이 싫었다고 해요. 마침 나타난 돌파구 대상이 바로 한국이었던 것 같아요. 방송국 PD들이 원체 바쁘잖아요. 그런데 3일 정도만 휴가를 받으면 절 찾아왔어요. 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특히 윤동주의 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어요. 결국 NHK에서 윤동주에 대한 프로그램을 만들더군요. 그 정도로 한국에 심취했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조용히 와서 일제 강점기시대 자국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며 사과를 하더군요. 그때부터 우리는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된 것 같습니다.

이 친구와 매일 밤 도자기부터 시작해서 인생 이야기까지 많은 대화를 나눴지요.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잠이 들고 밤 10시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그야말로 ‘아~ 옛날이여’였지요(웃음). 다고와 함께 이야기하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주로 나를 만나러 왔지만 제가 일본에서 전시회가 있을 때는 이 친구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다고는 저를 일본 박물관에 데려가 전시된 한국 도자기들을 보여주곤 했지요. 제가 만들고 있는 이도다완은 조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보다 일본인에게 인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 도자기가 일본의 국보가 된 것이 열네 점이 있는데 세 점이 청자, 한 점이 분청사기, 그리고 나머지 열 점이 모두 차사발, 이도다완이었어요. 더욱이 제가 공부할 때는 한국에 이도다완에 대한 연구 기록이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 실물조차 보기 힘들어 주로 책을 보며 연구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저도 다고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우리 큰아들이 장가를 갔는데 다고가 결혼식 주례도 맡아서 해준걸요. 아들의 성장기를 봐온 삼촌 같은 사람이니 누구보다 그 아이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구요. 게다가 경험이 풍부하니 인생 선배로서 다양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이 특별한 주례 선생님을 내세운 것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주례라는 것이 대부분 천편일률적인 면이 있잖아요. 지루하니 손님들은 잡담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외국인이 한국어로 주례를 하니 손님들도 신기해하고 무슨 얘기를 하나 모두 집중하더군요(웃음).

다고 기치로가 말하는 한국, 한국인 윤동주, 내 인생의 지표 다시 제가 이야기할 차례인가요? 그렇다면 조 선생님이 잠깐 언급하신 것을 보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한국의 윤동주 시인입니다. 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계기 중 하나가 윤동주 시와의 조우였습니다. 저는 일본의 버블 시대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터였어요. 허구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저는 한없이 고독했습니다. 그런 젊은 시절에 읽은 윤동주의 시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정신적인 지주가 될 정도로 중요한 존재가 됐지요. 특히 ‘서시’에서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이 구절은 제가 살아가는 데 큰 지표가 돼주었지요.

저는 윤동주 시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공영방송이던 KBS와 NHK는 공동제작 형식으로 프로그램을 1년에 한 번씩 함께 만들곤 했죠. 저는 어두운 시대에 열심히 살아갔던 윤동주 시인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몇 번이고 NHK에 기획안을 냈어요. 그러나 계속 거절당했지요. 한일 관계는 작은 일에 민감해지기 때문에 공동제작의 소재는 논란의 여지가 적은 예술이나 문화에서 선택했지요. 역사, 특히 근대사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 추세였어요.

일본인 작가 다고 기치로는 ‘한국인의 정’은 어떤 세계 문화유산보다 값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조성주 가족과의 이야기를 쓴 책 「또 하나의 가족」이 한일 동시 출간됐다.
그러나 저는 뜻을 굽힐 수 없었습니다. 신년 휴가를 받고 조 선생님 댁에 방문해서 선생님의 지인인 KBS 국장님을 소개받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요. 결국 KBS가 기획안을 내고 NHK가 동의하는 식으로 제작이 성사됐습니다. 드디어 1995년, 광복 50주년(일본은 종전 50주년)기념 공동제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일본 통치하의 청춘과 죽음’이라는 다큐멘터리가 탄생됐습니다. 조성주 선생님의 힘이 컸지요. 이 프로그램은 22년간 프로듀서로 근무한 경험 중, 가장 큰 의미를 지니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1999년부터 NHK 주재원으로 영국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 뜻한 바 있던 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회사를 퇴직했습니다. 그대로 영국에 남아 지금까지 문필 활동을 하고 있지요. 그곳에서 저는 힘들 때마다 윤동주의 시를 떠올렸어요. 더 많이 배워서 참된 인간으로서 성장해야 한다 생각했고 그렇게 글을 쓰며 배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비단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간극의 벽을 넘는 것에 흥미가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제가 출간한 책 밑바탕에 깔린 공통된 주제입니다. 내년 초 쯤 또다시 한국에서 책을 낼 계획입니다. 이번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어느 인물에 관한 내용이지요. 혹시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분을 아시나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으로서 한국 문화재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던 민예연구가입니다. 3·1 운동 후 일본이 경복궁 앞에 대리석 축조물 조선총독부를 세우기 위해 광화문이 철거될 위기에 처했었지요? 그는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언론을 통해 철거 반대 여론을 형성했지요. 덕분에 광화문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게 됐다고 합니다.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요.

그러나 그의 부인인 ‘야나기 가네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 같지 않더군요. 그녀 역시 시대의 풍파 속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한국을 위해 살다 간 인물입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습니다. 일본에서는 「나의 노래를 당신에게 -야나기 가네코 絶唱의 조선」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상태입니다. 성악가였던 그녀는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한국인들에게 노래로 용기를 북돋워줬습니다. 음악은 단순한 멜로디를 초월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별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지요. 노래가 갖는 휴머니즘 말입니다. 특히 음악을 사랑하는 한국인들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도 노래에 감동해 그녀를 돕고 협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동인지 ‘폐허’에도 참가했던 남궁벽 시인입니다. 천재 시인이지만 28세에 요절했지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가네코씨의 활동을 도와주며 같은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한일 관계가 역사적으로 가장 좋지 않던 시절이기에 그 벽을 넘은 두 사람의 우정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저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조 선생님과 제가 겹쳐 보였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이등변 삼각형이 하나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세 나라를 선으로 연결하면 이등변 삼각형이 나오지요. 밑변이 짧고 등변이 긴 삼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을 겁니다. 등변의 길이를 생각하면 밑변의 길이는 아주 짧죠. 즉 한국과 영국의 거리를 생각하면 한국과 일본의 거리는 아주 가깝습니다. 이 짧은 거리에 벽이 있다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요?

저는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3의 나라에서 두 나라를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좀 더 객관적이고 융통성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말도 할 수 있지요. 일본에서는 제 발언이 비난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이웃나라 한국에 대해 먼저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저는 작가의 자리에서 벽을 건너고 또,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저에게 그런 사명을 갖게 해준 나라가 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능성을 보여준 분들이 조성주 선생님과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도예가 조성주 趙誠主 作, 粉引徳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