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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品

[165] 고리古里 송선상宋善常, 鶏竜山窯 茶碗



사천의 도예가들


  사천시의 도자기를 말하면 위선 정희(申正熙)를 들 수 있다.
  신정희(申正熙) 1930년 경남 사천시 사천읍 구룡요(九龍窯) 9대 후예로 태어나서 1946년 남양중학교를 2년 중퇴하고 가업(家業)인 도자기 만드는 요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남 고성군 구만면 구만리에 있는 도자기 제작소에서 도자기 수업을 하였고 뛰어난 도공이었던 조부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후 그는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옛 가마터(窯址)와 질그릇조각을 찾아나섰고 군 복무 시절에도 반공호를 파다 나온 도자기 파편을 배낭에 넣고 다니다가 기압을 받기도 한 장인(匠人)의 기질을 타고난 도공이었다.
  전국 200여 곳의 가마터를 돌며 질그릇의 흙과 유약성분을 분석하는 등 각고(刻苦) 끝에 옛 선인들이 사용한 흙의 종류를 알아냈고 감나무· 느릅나무 등에서 유약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신정희는 이를 바탕으로 29살 때인 1959년 경북 문경군 갈평리 관음마을에 있는 조령산(鳥嶺山)에 등요(登窯)를 열고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 이조자기를 순수식물 유약으로 재현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그는 고려와 이조의 청자와 백자의 신비에 매료되어 한 평생을 도예 재현을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답사와 연구 끝에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소담한 질그릇 사발과 분청백자를 재현시켜 일반인들에게 선보이게 되는 전통 도자기를 1973년 부산직할시 문화제에서 이도차완(井戶茶碗)으로 특선을 받게 되고, 1974년 국전에 입선하는 등 전통 도예를 인정받게 되어 1975년에도 한국국민전에서 진사차완(辰砂茶碗)이 특선을 받게 되기도 했다.
  1979 6 19부터 22일까지 서울 롯데호텔 전시장에서 KBS가 주최하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전통도예전은 <해외동포 모국방문 돕기 성금모금> 전시회라 하였지만 그 보다도 임진왜란 후 대가 끊긴 것으로 알았던 노란색 유약사발과 연회(練廻)항아리 등을 재현한 신비한 기술이 4반세기를 흙에 바친 한 장인(匠人)의 집념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것이다.
  신정희가 처음 사기굴을 연 곳은 문경읍 관음리 조령산 인적이 없는 첩첩산중에서 세상의 모든 잡념을 잊은채 오직 선인들이 남긴 도자예술을 재현시키는 데 생애를 바친 결과였다.
  1970, ()를 부으면 찻잔 안에 반점(班點) 같은 꽃이 피는 비취색 분청사발 재현에 성공했을 때도 또 순식물성 유약에 의한 노란색 사발(우리나라 박물관에는 없고 일본에 단 1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음)을 재현해 냈을 때도 신문과 잡지에 1단기사로 보도되었을 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보배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서일까! 그의 고독한 작업은 국내에서 빛을 보지 못했으나 일본의 도예전문가와 차인(茶人)들에 의해 빛을 보았고 극찬을 받았다.
  1975년 이후 그는 일본에서 2회의 개인전과 수 차례의 초대전을 가져 일본인들을 매료시켰고, 197 2회토오교오 긴자 마쓰사께야(東京銀座松城)에서 첫 초대전 때는 일본 천황의 아우이며 도예전문가인 다까마쓰노미야(高松宮)의 극찬을 받았고 1977년에시켰고미우리신문(讀賣新聞) 주최로 큐우수(九州) 9개 도시 순회전을 가지기도 했다.
  그는 조선 서민대중이 쓰던 사발을 일본인들은 흠모하는 찻잔(慕碗)이라 하여 가보(家寶)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밥그릇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들은 제가 만든 전승 사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락지를 뺀 두손으로 들어올려 보배처럼 감상하더군요. 외국에서도 이처럼 귀중하게 여기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유의 질그릇, 조상의 얼과 생활의 멋이 깃든 전통자기를 우리 국민에게도 그 귀중함을 알려주고 싶어 국내전을 열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곳곳에서 채집한 8가지 흙(胎土)를 배합, 반죽하여 물레 위에 얹어 놓고 발로 물레를 돌려 그릇형태로 만들어 30시간 말리고 그 뒤 가마 속에 넣고 7시간 내지 8시간 동안 500의 열을 가하여 불을 끈 다음 해열한 후 나만의 비법인 22가지 순식물성 유약을 발라 빛깔을 내고, 이것을 다시 가마에 넣어 1200의 열을 가하면 신비스러운 그릇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도자기 애호가들의 취향에 맞춰 고려와 조선자기의 형태와 기법을 전승하면서 민화(民畵)등의 기법을 새롭게 가미하고 문양을 도입하여 전통미와 현대 감각을 조화시킨 작품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신정희의 도자기에 대한 애착이나 창작기법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역시 밥그릇, 국그릇으로 사용되던 분청백자사발이라 할 것이다. 고려청자백자가 지닌 귀족적인 조형과는 달리 고려 말 조선왕조 초기에 구워졌던 질그릇 사발들은 거칠면서도 소박한 서민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고 꾸밈없이 자연 속에서 빚은 도공의 솜씨에서 조상의 멋과 민족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가 일본에서 첫 초대전을 할 때 인사말을 들어보면 촌부(村婦)처럼 질박순후(質朴淳厚)한 이조 도자기의 자태에서는 스스럼없이 안기고 싶은 충동을 주는 어머님의 품과 같은 친숙감(親熟感)이 물씬 풍깁니다. 이게 나를 도자기에 매료시킨 연유(緣由), 나로 하여금 심산유곡(深山幽谷)을 헤매게 했고 흙과 물레와 가마를 벗 삼게한 기인(起因)입니다. <중략> 이런 실패의 연속이 나를 몇 번이나 허탈감에 빠지게 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도공인 조부(祖父) 이조도공의 마지막 후예의 피가 나의 몸 안에서 끓고 있는 탓일까요? 한 인간으로서, 아니 가장(家長)으로서 처자식을 멀리 해온데에 대한 자책감보다도, 뜻대로의 작품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숱한 성상(星霜)을 허송했습니다. 고민으로 나는 마음을 할퀴어 왔습니다. <중략>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건너 와 도예의 꽃을 피운 일본 땅에 와서, 보잘 것 없는 이 후예가 작품을 소개하게 된 것을 더 없이 기쁘게 여깁니다.라고 그의 심정을 술회하고 있는데 장인의 심정이 더욱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일본인들은 신정희가 재현한 비취색분청사발을 가리켜 환상(幻想)의 그릇이라고 격찬했고, 노란색 사발은 국내의 전문가들을 경탄시킨 전승도예의 개가(凱歌)로 평가되고 있다.
  221번의 실험을 거쳐 1979년에 구워냈는데 일본에 단 한 점 있는 일본의 국보와 같은 색깔이다. 청자의 태토에 나무재에서 발견한 유약으로 장작가마에서 구워 냈지요하고 그는 말한다.
  노란색 찻잔과 함께 재현해 낸 또 하나의 개가는 연회(練廻) 자기다. 이것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태토를 손으로 빚어 올려 성형하여 빚어낸 자기를 태토의 성질과 유약의 영향에 따라 각기 다른 빛깔을 내는데 「오랜 경험과 영감에 의해 재현할 수 있었다」고 신씨는 말하고 있다.
  그가 전통자기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이 나이 18세 때 시인 김상옥(金相沃)씨가 준 청자조각에서 연유되었고, 그의 할아버지 신대욱(申大煜)은 고성군 구만면 구만리 가마터에서 도자기를 굽던 이조의 마지막 도공으로 일생을 보낸 이조 도공이었으며 신정희의 아버지 신구(申柩 : 작고) 옹은 작업이 혹심하게 고달파 뛰쳐나와 당시 사천군 용현면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신씨를 그곳에서 얻게 되었고 그는 남양중학교를 2년 중퇴하고 도예에 심취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고려 중엽에서 조선왕조 말엽까지 700여 년 사이에 있었던 옛 도요지를 찾아 파편을 수집, 그것을 분석하여 태토의 원산지를 찾아내고 조상들이 쓰던 유약을 연구하고 가마의 구조를 재현하는 등 임진왜란 이전의 신비를 캐는데 소요된 보금자리 문경 관음 조령산 속의 조령요는 평생동안 청춘을 불사른 애원(愛怨)의 땅이며, 감격의 땅으로 사랑도 미움도, 집념으로 도자기를 재현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1976년 여름 수해를 당하여 11월에 양산 통도사 옆에 있는 현재의 도요지로 옮기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팔기 위한 제품생산에 유혹당하지 않고 오로지 한국 전통자기의 재현에만 힘쓰면서 「한 점이라도 뛰어난 문화재를 남겨 세계에 우리 자기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 신정희씨의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향에서 수 차례 초대전을 문화원에서 개최하고 그가 기증한 소중한 작품들이 사천문화원의 향토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음은 사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도예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활동 중에 있는 도예가로는 와룡도예원의 송선상(宋善常), 청산요의 윤창기(尹昌基), 고천도예원의 한완수, 진산도예원의 권외득, 도청도예원의 김홍배, 곤명요의 김영태, 사천등요의 정충옥, 율곡공예사의 하남용, 민속상사의 김명주, 동촌산방의 김한수, 케이· · 씨의 오제선, 향림도예연구소의 와심(瓦心) 이계안(李桂安), 금암요의 박영현 등이 창작활동에 여념이 없다.
  고리(古里) 송선상(宋善常) 1941년 5월 15 사천시 벌리동 415번지에서 태어나서 삼천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을 제대후 1968년 경북 문경, 단양, 상주, 점촌의 도요지를 다니면서 우리의 전통도예 기법와 유약을 익히고 1970년 문경에 계룡요(祛龍窯)를 다시 만들고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1985년 삼천포시청 청사 준공기념 삼천포시장 초대전을 시작으로 86년 서울 롯데호텔 사파이어룸 개인전, 86년 부산일보 도예작가 10인 초대전, 87년 진주가야화랑 개인전, 89년 마산 청운미술관 개인전을 비롯하여 86 KBS TV 뉴스파노라마 작가 소개 프로 방영으로 격찬을 받았다.
  1988년 와룡도예원 회원이 주축이 된 도자기 연수 모임인 한솔회가 창립되어 88년 10월 27부터 31일까지 5일간 삼천포 국민은행 2층 전시실에서 창립전을 열고 현재까지 10회의 한솔회전을 개최하고 있으며 송선상이 직접 지도강사를 맡고 있는 한솔회의 현재 회원으로는 회장에 이영숙, 정미남, 차정화, 조우경, 허민자, 김미영, 배명숙, 우정애, 강명화, 이서분, 박순덕, 심정숙, 송미옥 등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는 삼천포 야외설치전 운영위원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10회의 야외설치전을 개최하고 97 K.B.S 진주방송국 여성대학에 도자기 창작법을 강의하고 있으며, 96년에는 경남탄생 100주년기념 특별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1978, 82, 83년 경남 미술대전 입선과 83, 88, 89, 92년 전국 관광민예품전에 입선하였고, 79, 82, 89, 92년 경남도 관광민예품전에 입선과 특선한 관록이 있다.
  현재 그는 남양동에서 와룡요를 운영하면서 2001 3월에는 시민문화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와심(瓦心) 이계안(李桂安) 1947년 경남 삼천포시 송포동 중촌에서 이조도공의 후예 이경래(李敬來)의 아들 이삼석(李三石) 옹의 아들로 3대가 모두 도공으로 활동했다.
  할아버지 이경래는 고성에서 도공생활을 하다가 자식인 이삼석에게 물려주고 이삼석은 남양도기주식회사 창립시부터 공장장을 할 때까지 도예를 생업으로 삼았으며 현재 79세의 나이에도 자식인 이계안의 도예활동에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나가기 위하여 남양도기를 거쳐 일본 유전(有田), 일본 요업개발에서 현대 도예를 다년간 연구하고 귀국하여 30여년동안 향림(香林) 도예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와심(瓦心)은 고 봉계(鳳溪) 김재석(金在奭)선생 밑에서 사사(師事)하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데 현재 세계미술가협회, 산업미술가협회, 한국미협, 사천미협 회원으로 있으면서 한길회 인천 예일화랑 특별전에 출품을 시작으로 삼천포문화원 초대전, 필리핀 마닐라 2인전, 2인百想)기념관 개인전, 진주영남백화점 초대전, 경남문화예술회관 개인전, 부산 엘지 종합금융전시실 개인전, 한국미술 2000년 초대전, 동경 아시아 미술대전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전시회에 많은 작품을 출품하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KBS 2회 입선, 동아대전 2회 입선, 서울신문 제5회 현대도예전 특선, 경남신문 공모전 전통도예부문 특선, 민예전 동상, 장려상, 기관장상과 한국미술대전 금상을 수상했고 마산 KBS 방송국 문화가 산책에 마산 MBC 방송 문화가 산책에 초대되어 전통도예의 맥을 선보였으며 2000년에는 향림도예연구소 개원 10주년 기념 제6회 개인전을 부산광역시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와심은 한국의 도예계를 이끌던 고 김재석 교수의 제자로서는 성공한 도예가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 도예계의 원로인 홍익대학교 미대학장인 원대정(元大正)교수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성신여대 박물관장인 대훈(大薰) 장윤우(張潤宇)교수는 30여년 오랜 경륜을 닦은 와심은 천목(天目), 결정유(結晶釉), 철유(鐵釉), 재류 등에 뛰어난 분이며 그 기량을 주목받고 있는데 현대도요계에서 걷고 있는 위험한 모험(冒險), 예컨대 도조(陶彫 : Cetamic Sculptqre)를 탐하지 않고 전통 도자의 외곬을 지켜가고 있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왕성한 조형의식과 한 점 한 점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성형기법, 그러면서도 나서지 않는 성품이 작품 속에 살아 있다.고 평가하는 역량 있는 도예가로 인정받고 있다.
  고천 도예의 한완수(韓完洙)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30여 년 간 도예작업을 하는 중진 도예가다. 대한민국명장 00-21호로 원적외선 바이오 황토 항아리 (발명특허, 품질인증) 등 많은 특허품을 갖고 있으며 경남 공예품 경진대회 `96, `97, `98, `99 4회 대상, 전국 공예품 경진대회 특선, 경상남도 문화예술회관 3인전, 강릉, 속초, 동해시에서 3인전, 롯데백화점 특산 공예품전 등 국내외 많은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신지식인 제72, 대한민국 2000 명장 회장, 대한민국 공예명장 21C회장, 한국 다도회 대학원교수, 경상대학교 공과대학부설 도자기공예 기술연구소장 등의 직을 맡고 있다.
  고천 도예의 특색은 황토제품을 개발하는데 주력하여 황토의 작용효과를 등대시키는 메카니즘이 형성되어 열에너지를 복사 방출하는 능력이 다른 물체보다 뛰어남을 착안, 전통기법을 살리면서 실생활에 필요한 생활식기, 물컵, 다기류 등 40여종의 원적외선 바이오 황토 김치항아리, 쌀 항아리, 물 항아리 등 30여종과 관상용 도자기, 공기정화용기, 전자파 흡수용 캐릭터형 인형 등 여러 종류를 개발 생산하고 있다.
  요지는 사천시 사천읍 두량리 374-5번지에 있고 현재 케이씨씨 고천 도예를 운영하고 있다. (Tel. 854-8343, 011-889-8343)
  도예가 단산(丹山) 김영태(金永泰) 1964년 합천 삼가에서 태어나서 1979년 도예에 입문, 부산 경성대학교 예술대학 공예학과(도자전공)를 졸업하고 옛 우리 조상의 가마터가 산재해 있는 곤명면 성방리 192번지 2에 곤명요를 개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단산은 1984, 85년 부산미술대전에 특선, 입선에 이어 1985, 86년 부산 산업 디자인전 특별상, 입선을 거쳐 1990년에서 93년 경성공예가회에 출품하고, 1990년부터 98년까지 부산 도예가회 작품전에 꾸준히 출품하면서 1998년 단산 김영태 명다완전(경남문화회관), 단산 김영태 작품전(진주내고 갤러리), 1999년 단산 김영태 막사발전(서울캠브리지 갤러리), 단산 김영태 우리지역 막사발전(경남문화회관) 등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단산은 특히, 1999년에는 3년여 기간 동안 「곤남군 장흥고를 중심으로 분포한 고요지에 관한 소고」의 연구 논문집과 2000 10월 조사연구집 「조선 막사발 옛터를 찾아서 : 곤남군 고요지에서 출토된 다완 도편 소고」라는 논문집을, 이어서 「곤남군 반용소 답사에 관한 소고」와 「곤남군 정호 태토류에 관한 소고」 등 사천지역 도요지와 정호차완의 발원지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도자기 뿐만 아니라 우리 도자기사를 밝히는 학자로서의 면모를 지켜 나가고 있다.
  단산 김영태는 곤명의 정호차완을 재생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한편 작품전도 모두 차완 일색이며 특히 사천지역 다기의 역사를 밝히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현재 단산은 부산 도예가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사천시 곤명면 성방리 192번지 2에서 곤명요를 운영하고 있다. 전화는(055-852-8378, HP:016-586-8378)
  백하(白下) 정충옥(鄭充鈺)은 사천에서 태어나서 효당 최범술과 한학자 육천 안봉언 선생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추전 김화수의 추전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수학하였으며, 그 후 한국도자기에 심취하여 「신정희 요」와 「수로요」에서 도예 수업을 하다가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84번지에서 사천등요(泗川登窯) 백하도예연구소를 열고 20여 년 도예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백하는 1991년 한국미술대상전(국제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각종 전시회에 많은 작품을 출품하고 있으며 지난 2000 12월에는 진주 경남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개인 도예전을 갖기도 했다.
  경기도 문화재 위원 임영주는 「철화백자 항아리, 분청사기 항아리 등은 예전의 전통적 격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조형적 기질이 엿보이는 두드러진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도예지는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814번지에 있고, 전화는(055-852-4092 HP. 011-842-4092) 이다.
  김남진(金南珍) 도예 연구가는 사천시 사남면 화전리에 가야비파구룡요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그는 1996 8월 사남면의 구룡저수지 위의 임도(林道) 개설 작업을 하던 중 구룡저수지의 수면과 산 기슭의 경계 부근에서 우연히 가마터를 발견하여 당시 사천문화신문사의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가마터 발견과 그곳에서 찾은 유물을 각계 전문가에 감정 의뢰하면서부터 도자기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가야비파구룡요를 개설하고 도자기에 입문하게 되었다.
  앞에서 막사발 원류를 설명하면서 언급하였듯이 김남진아가노야끼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되고 이도차완 즉 막사발 재현에 온 힘을 쏟고 있는 도예연구가이기도 하다. 그는 1997년부터 현재까지 비파색 찻사발을 재현하는데 구룡요 근처에서 나오는 태토와 유약으로 구운 막사발이 일본인들이 말하는 막사발과 같은 것임을 주장하면서 아가노야끼의 원류가 사천의 구룡요임을 설명하며 막사발 재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는 구룡요 주변을 한국 도자기의 큰 자랑인 막사발의 고향임을 입증하여 국가문화유적지로 지정받아 전시관을 건립하고 일본과 한국의 도자기 문화 교류와 뿌리찾기에 앞장서면서 사천 도자기의 우수성과 막사발의 원류임을 밝힐 것을 다짐하고 있다.
  가야비파구룡요는 사천시 사남면 화전리 109-3번지에 있고 전화 055-854-4365이다

쫥 참 고 문 헌 쫥


한국의 회화사 일지각 1980

고고미술 제143, 144

세계미술전집. 계간미술.

삼천포시지

사천군지

하동군지

진주시사

통영시지

문경군지

한국브리태니커(1999)

살아있는 신화(바위그림) 정동찬 1996 (헤안)

한국미술의 기원 박용숙. 예경사(1990)

서양회화사

곤남군 정호 태토류에 관한 소고 김영태

조선막사발 천년의 비밀, 한질아트간, 정동주(2001)

아가노야끼 원류를 찾아서, 김남진 연구보고서